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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Stonegate Live Club Story"

tomshim 2014. 10. 13. 11:28

 

 

 

 

 

 

 

Tacoma의 우리집

 

 

 

당구대가 있는 우리집의 홈바.

 

 

 

뱍난로가 있는 거실.

 

 

 

연습실.

 

 

 

우리 부부가 운영하던 Stonegate Club.

 

 

 

 

건물을 구입하고 아내 제니퍼가 애견 씨씨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1990)

 

 

 

 

공사중인 클럽의 무대에서 잠시 쉬고있는 나.

 

 

 

 

공사중인 식당 내부.

 

 

 

 

클럽의 저녁 연주모습.

 

 

 

 

바텐더를 하는 아내 제니퍼.

 

 

 

 

클럽앞에 서있는 필자.

 

 

 

 

클럽 2층의 우리 거실.아내와 애견 씨씨,마쵸.

 

 

 

 

2층의 내 악기실.

 

 

 

 

스톤게이트바에서 우리 부부.

 

 

 

 

 

 

스톤게이트의 밤 풍경(1992)

 

 

 

 

스톤게이트 레스트랑

 

 

 

Stonegate는 미국 씨아틀에서 40마일쯤 아래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타코마에서

내가 1990부터 귀국한 2004년까지 약 15년간 운영한 라이브클럽으로 이 시기는

내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때였으며 그리운 추억으로 가득차있는 곳이다.

1976년 나는 괌에서 만난 미국인 아내 Mary와 하와이에서 음악활동을 하다가

여러 사정으로 이혼한후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미군에 입대했는데 훈련소를 거쳐

근무발령을 받은곳이 Ft.Lewis라는 육군사단이 있는 타코마였고 3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나는 이곳에 자리잡고 7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내 인생의 황금기인 30대,40대,50대를 이곳에서 보냈다.

 

Ft.Lewis는 한국을 오가는 미군들이 많이 거쳐가는곳으로 70년대부터 이미

국제결혼한 한국인들과 가족들을 시작으로 한인인구가 점차 늘어가는 중이였는데

이곳에는 일찌기 자리잡은 옛날 미8군시절의 선배가 운영하는 클럽들도 있어서

당시 미군은 사병도 출퇴근이 가능했던 덕분에 나는 근무가 끝난 저녁엔 

클럽에 나가 연주를 할수가 있었다.

 

제대후 연방공무원인 체신청에 취직한 나는 퇴근후 밤마다 여러 클럽에서

연주활동을 했으나 미국사람들과 한국교포 손님들이 반반인 업소에서는

한국교포들을 위해 한국의 유행음악도 연주해야했고 특히 소위 가라오케라는

반주기가 등장하기 이전인 그 시절엔 밴드들의 반주에 맞추어 무대에 올라와

노래를 하는것이 한국교포들이 술집에 놀러오는 주요원인이기도 했기에

한국유행가를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는 나는 힘들게 미국까지와서 내가

하고싶은 음악이 아닌 술취한 손님 상대의 노래반주로 아까운 시간을 보낸다는게

너무 고역이고 싫었다.(수입은 많았으니 배부른 소리지만...)

 

미8군에서 음악을 시작할때부터 그들의 Rock,Blues등의 음악에 심취했던 나는

미국사람 상대의 6,70년대 음악에는 자신이 있었고 결국 내가 하고싶은 음악을

내 마음껏 하는길은 내가 스스로 업소를 하는수밖에 없다는걸 깨닿는다.

 

이 시기에 나는 지금의 아내 Jeniffer를 만난다. 나와 많은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사에 마음이 통했는데 무엇보다도 그녀는 나의 음악을 좋아하고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를 100%이해해준 최초의 한국여성이였다.

결혼후 우리는 당시에 살던 방6개에 화장실이5개,당구대와 홈바가 있고 땅이

1 에이커가 딸린 큰집을 팔아서 우리가 마음껏 음악을 할수있는 Live Music Club을

시작하기로 의기투합하는데 이 모든 새로운 시작은 그녀와 함께였기에 가능했으며

나 혼자였으면 아마도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이런 출발을 하기가 쉽지않았을것이다.

 

1990년 드디어 타코마 시내의 2층 건물을 인수한 나는 아랫층을 클럽과 식당에

필요한 시설로 개조하고 이층 전체를  우리의 살림집과 악기실, 레코딩을 할수있는

홈 스튜디오로 고쳐 음악활동에 대비한후 노후가 보장된 평생직장으로 미국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체신청의 좋은 직장을 미련없이 사직하고 자유롭게 내 음악에

올인할수있는 나만의 세상을 시작하게되는데 나는 그곳을 Stonegate이라

이름지었고 이제부터는 오직 내가 좋아하는 음악만을 연주할 작정이였다.

 

처음엔 몇명의 밴드로 시작했는데 연습부족으로 내가 바라는 음악이 나오지않고

또 각자 개인문제가 많아서 안정된 음악을 하기가 힘들어 고민중 마침 그당시 반주를

만드는 키보드 씨꿘서라는게 처음 악기점에 나왔다.

나는 장비일체를 사서 요즘은 흔히 쓰이는 MR을 만들기 시작,이후 one Man Band로

혼자 연주활동을 했는데 다른 밴드멤버에 신경쓰고 구애받을일 없이 내가 하고싶은

음악을 아무때고 할수있으니 너무 편하고 좋았으며 반주기가 없던 20년전인

그 당시만해도 어떻게 그런 사운드를 혼자 내느냐고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Jimi Hendrix, Eric Clapton,Led Zeppelin,Santana,Deep Purple,Pink Floyd등등

내가 좋아하던 6,70년대의 Rock과 Blues만을 연주했는데 몇명의 밴드로도 내기 힘든

사운드를 혼자 낼수가 있어서 술집과 밴드들이 많은 South Tacoma거리에 혼자

연주하는 동양인으로 소문나서 미국밴드들도 많이 구경을 왔으며 장사도 잘되었다.

 

또한 이층의 녹음실이 있으니 아무때고 틈틈이 자작곡들을 만들어 녹음을 할수가

있었는데 상업적인 목적으로 음반을 만드는것이 아니여서 대중의 반응이나 판매량에

신경을 써야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야말로 모든 작업은 나하고 싶은대로만 하면되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이루어졌다.나는 연주,노래,녹음,편집,앨범커버까지 혼자서 한

솔로 앨범 두장(Going Home. Night Walker)을 만들었는데 이런 삶은 한국에서 음악을

시작할때부터의 꿈이였다. 이리하여 우리 부부는 아무 부족함없이 그 누구에게도

구애받지않고 자유롭게 음악과 함께 15년을 행복히 살았다.

 

내가 Stonegate를 접고 귀국을 생각하게된것은 어느날 어머니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자 극심한 허탈감과 함께 76년 기타하나만 둘러메고 미국에 온후 쉬지않고

달려온 그간의 누적된 피로를 처음으로 느끼면서였다.

또한 더 늦기전에 아내의 부모님이 아직 한국에 생존해 계실때 아내가 부모님과 함께

지낼수있는 기회를 주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새삼 깨닿게되면서 잠시

모든것을 뒤로하고 귀국하여 휴식과 재충전을 하기로 아내와 뜻을 같이하게되어

2004년 7월,드디어 나는 30년만에 처음으로 한국땅을 다시 밟게된다.

 

나의 고향인 서울에는 이미 아무 연고가 없어 나는 처가가 있는 천안으로 들어왔는데

몇년 한국에서 살다가 미국에 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는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올해로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러가 버렸다.

그간 한국에서는 몇번의 공연기회가 있었고 무심코 올린 연주 동영상이 화제가 되어

MBC의 화제집중이란 프로에 출연한적도 있으나 이후엔 모든 제의를 고사하고

조용한 은둔생활을 즐기고있다.

2012년 11월 영국 리버플에 공연을 다녀오면서 비틀스로 시작한 나의 음악인생을

비틀스 고향에서의 연주로 마감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의 욕심이나

미련을 버리고 지난 세월을 정리할때가 된것같다. 돌이켜보면 하고싶은 대로의 삶을

산다는게 결코 쉽지않음을 생각할때 그래도 나는 행운아인듯 하다. 

 

한국생활엔 대체로 만족한 편이다. 부부가 일을 안해도 생활은 할수있는 준비가

되었고 이제는 생업을 위해 일하지않고 취미와 여가를 위해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으니 생각하면 감사하고 행복한 노후라 할수있다.

가까운 처가에 오가는것외에 우리부부는 대인관계가 전혀 없을 정도로 단둘이

집에서만 보내는데 조금도 심심하거나 지루하다는 생각은 없다.

나는 컴퓨터와 Youtube,그리고 오랜 취미인 컴퓨터 게임등을 즐기고 미국서

기회만 있으면 사모았던 많은 음악CD들을 이제야 편히 실컷 감상한다.

평생 음악을 많이 들었지만 요즘같이 여유롭게 많은 시간을 음악감상과 기타연습으로

보낸적이 없었으니 어차피 술,담배도 안하고사람들과 어울리는것도 별로

좋아하지않는 나에겐 바라던대로 평화로운 은퇴후의 삶인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Stonegate시절의 꿈을 자주 꾸는데 그런날은 아침식탁에서 간밤에 꾼

스톤게이트 시절의 우리 부부만 알고 이해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회상한다. 

그 많던 친구들 지금은 무얼하고 있을까. 이제 충청도 시골의 평범한  노부부가 된

우리는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도 계속 Stonegate의 꿈을 꿀것이다.

 

우리가 Stonegate를 지금까지 계속 했더라도 변함없이 즐겁고 행복했을까?

그건 알수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한국에 돌아온것도, 여기서 조용히 여생을

마치는것도 우리의 운명으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지금와서 생각하면 우리의 젊음과 함께 흘러간 Stonegate시절의 그리운

모든 순간 순간들은 한때 우리가 음악과 함께 너무도 행복했던, 분명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들이였다.